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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8일 수요성서연구<유다 왕조의 최후>
2021-09-08 11:42:3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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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다 왕조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처럼 비잔틴 제국이 그러했다. ‘곳이 콘스탄티노플 방어성벽의 위치고, 아마 오스만 투르크 함대는 저쪽 바다로 들어와서 병력을 상륙시켰을 것입니다.’ 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이 눈에 훤히 들어오는 곳, 이스탄불이라는 현대식 도시로 바뀌어져 있다. 500여 년 전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1453529일 천년 제국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저 유명한 콘스탄틴 대제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이 도시는 전체 구조가 삼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두 면이 바다여서 이를 십분 이용한 성곽 방어 구조를 통해 천혜의 요새로 발전했다. l,000년 역사 동안 수많은 외적의 침략을 받았지만 십자군 4차 전쟁 때, 믿었던 십자군에게 약탈당한 것 외에는 한 번도 콘스탄티노플은 외세에게 함락당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난공불락의 요새만으로 쇠약해져 가는 비잔틴 제국의 국력을 부지할 수는 없었다. 날로 강대해져 가는 군사력으로 아프리카 북부와 유럽 남부 전역을 압박하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 이슬람 세력의 주체인 바로 그 오스만 투르크의 대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비잔틴이 어떤 제국이던가? 고대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에서 흡수한 모든 요소에다가 오리엔트적인 요소를 더해 만들어진 최고의 문명이다. 이 문명은 그 자체로 그때까지 인류가 이룩한 최고 문명들의 결정체였다. 비록 국력이 쇠락해질 대로 쇠락해져 있긴 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바로 그 비잔틴 제국의 심장이었다. 로마의 후예를 자처하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어쩌면 서구 기독교와 동방 이슬람 세력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그만큼 콘스탄티노플이 가진 상징적 의미는 컸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당시 투르크군을 이끌던 술탄 메흐메드 2(A.D. 1451-1481)였다. 당시 21세의 청년이었던 그는 나이에 비해 무섭도록 대담하고, 지략이 뛰어난 정복자였다. 케말 파샤와 함께 터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꼽히는 메흐메드 2세는 기필코 저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리겠다는 일념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기발한 침공 루트를 택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 면한 콘스탄티노플에는 육지로 깊숙이 파고든 좁다란 골든혼(금각만)이 있어 그 입구에 쇠사슬을 설치하면 그 누구도 쳐들어 올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공격자들이 배를 산으로 올리는 미친 짓을 하지 않는 한 넘기가 불가능한 자연 방어선이었다. 그래서 방어군은 이쪽으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투르크군이 그 미친 짓을 감행한 것이다. 투르크군을 이끄는 메흐메드 2세는 젊은이다운 대담한 발상의 전환으로 전함 67척을 육지로 끌어올리고 산을 넘었다. 그 다음부터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대로 내해(內海)로 밀고 들어가 콘스탄티노플 성을 포위해 버렸다. 이후, 10만이 넘는 투르크의 대군이 무려 53일 동안 밤낮 없이 교대로 성을 공격했다. 비잔틴 방어군은 겨우 7,000명도 안 되는 군사로 필사적으로 잘 싸웠다. 방어군은 투르크군에 비해 무장이나 무기가 훨씬 뛰어났지만, 워낙 병력이 부족하여 병사들이 쉴 틈이 없어 거의 탈진 상태였다. 게다가 투르크군은 수만 많을 뿐 아니라 지독하게 정신 무장이 잘 되어 있었다. 술탄의 친위대 예니체리 군단 병사들은 외호 가장자리에 칼을 뽑아 든 채 서 있다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 병사들을 위협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거침없이 베어 죽였다. “적군보다 아군을 두려워하라!” 그것이 이 젊은 술탄이 투르크 병사들의 뇌리에 심어 놓은 메시지였다. 공격 초기, 이런 식의 무자비한 인해전술로 투르크 쪽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술탄은 상관하지 않았다. 여기다가, 방어군은 괴물이라고 불리는 투르크군의 가공할 신식 공성 무기 때문에 완전히 기가 꺾였다. 괴물이라는 대포는 길이가 8m가 넘고, 포탄 하나의 무게가 600kg이 넘는 무서운 무기였다. 이런 무기가 비 오듯 포탄을 쏘아 댔으니,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이 아무리 견고하다 한들 제대로 남아날 리가 만무했다. 병사들의 무장 상태나 군사 장비 면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이던 투르크군은 이 포병대 덕에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헝가리의 기술자 우르바노스가 만든 이 대포는 비잔틴제국으로부터는 거절당했으나, 투르크의 메흐메드 2세가 4배의 보수를 주기로 하고 만들게 했다고 하니, 비잔틴 제국으로서는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결정적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방어군 스스로가 제공했다. 성벽에는 오랫동안 안 쓰고 폐쇄시켜 놓은 작은 비상문이 하나 있었는데 어떤 베테랑 병사 하나가 그걸 기억해 냈다. 방어군은 이 문을 이용해서 몰래 성 밖으로 나가 적의 후방을 기습해서 많은 전과를 올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습 작전을 끝내고 귀환하던 방어군 부대의 마지막 병사가 그만 문의 빗장 지르는 것을 깜빡 잊었다. 그리고 그것을 투르크군에게 들켰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투르크군이 열린 문으로 순식간에 성안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콘스탄티노플을 도와주러 온 저 용맹한 스위스와 베네치아 용병들도 더 이상은 손을 쓸 수 없었다. 비잔틴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대성당을 투르크군이 에워싸며 난입하는 장면을 목도하고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6세기에 건축된 비잔틴 제국의 최고 걸작품으로 여겨지던 하기아 소피아를 완공한 당시의 황제는 그 건물의 웅장함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 오오,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도다!”라고 할 정도였다. 러시아의 블라드미르 황제가 보낸 사신들은 하기아 소피아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감격적이었던지, 마치 천국에 와 있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1,000년 동안 동방 기독교 예배의 중심지로 군림해 오던 그곳이 이제 이슬람 군대의 손에 짓밟히게 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최후를 직감했다. 수치스럽게 살아서 적의 포로가 되어 나머지 생을 마감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칼을 뽑아 들고 밀물처럼 밀려오는 적군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 투르크군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로써 세계사의 큰 축이 바뀐 것이다. 1,000년을 버텨 오던 기독교 제국 비잔틴의 최후는 역시 하나님을 믿는 선민들의 나라로 버텨 오던 유다 왕국의 마지막과 몹시 닮은 꼴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타락하면 아무리 외형적 기독교 하드웨어가 웅장해도 멸망을 피할 수가 없다. 그것도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들의 손에 말이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이은 남유다 왕국의 서글픈 마지막을 살펴보자.

 

3. 유다 왕국 최후의 성군 요시야의 뒤를 이어 유다 17대 왕으로 등극한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고작 3개월 밖에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유다 왕조 사상 가장 단명한 왕이 되고 만다. 선왕 요시야를 전투에서 죽게 한 뒤 유다 왕국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한 애굽 왕 바로느고가 그를 폐위시켰기 때문이다. 바로느고가 왜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볼모로 잡아갔는지 확실한 이유는 모른다. 학자들은 선왕 요시야의 반()애굽 정책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혹 젊은 왕 여호아하스가 상당히 똑똑하고 리더십이 있어서 애굽 왕실이 허수아비 임금으로 세우기에는 좀 골치 아프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정한 원인은 여호아하스 자신에게 있었다. 그는 그토록 몸부림치며 나라를 거룩하게 개혁하려 했던 아버지 요시야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이전의 악한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이 했던 것처럼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정화된 예루살렘을 하루아침에 다시 더럽혔다. 그렇잖아도 나라가 안팎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위기에 놓여 있는데 젊은 새 군주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걸으니 하나님이 진노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여호아하스를 버렸고 하나님의 보호막이 없는 그는 아무리 영악하다 한들 애굽의 압력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4. 애굽이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유다 18대 임금으로 내세운 왕은 요시야의 맏아들 엘리아김이었다. 폐위된 여호아하스와는 이복형제인 그는 애굽 왕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애굽은 자신들이 세운 왕 엘리아김의 이름을 여호야김(B.C. 609-598)으로 개명시킴으로써 유다가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나라임을 과시했다. 동시에 애굽은 여호야김을 새 왕으로 세우면서 유다에 엄청난 벌금을 요구했다. 이는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경우 보상하는 보상금을 말하는데 아마도 선왕 요시야가 애굽을 대적한 데 대한 괘씸죄를 물어 유다 왕국에 배상금을 요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애굽의 힘으로 왕이 된 처지에 그 배상금이 아무리 많다 한들 여호야김으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서둘러 애굽에 바칠 조공을 마련하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징수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여호야김은 자신이 거처할 초호화 왕궁까지 건설하는 무모한 악행을 저질렸다(22:13-14). 안그래도 숱한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찌들려 있는 백성들의 고통과 기울어져 가는 왕조의 암울한 운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이 무지한 왕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 우리야까지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26:20-23). 실로 여호야김이 다스린 11년은 안 그래도 기울어져 가는 국가의 수명을 재촉하는 어둠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재위 기간 내내 애굽의 눈치를 살피며 백성들을 압제했던 여호야김은 통치 말년에는 신흥 강대국 바벨론의 압박까지 받았다.

 

5. B.C. 605, 당시 국제 정세의 판도에 새로운 회오리바람이 몰아칠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유다의 요시야 왕을 죽였던 애굽 왕 바르느고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신흥 강대국 바벨론에게 참패한 것이다. 요시야 군대를 무너뜨리고 갈그미스로 갔던 애굽 군대는 일시적으로 바벨론을 몰아내고 앗수르를 구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전열을 정비한 바벨론에게 참패당하고 본국으로 쫓겨 오고 만다. 이 때문에 전통의 강호 애굽의 세력이 말할 수 없이 위축되어 버렸다. 이 때 애굽을 무너뜨린 바벨론군의 총사령관은 젊은 왕자 느부갓네살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는 느부갓네살이란 인물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 바벨론 제국의 창시자인 나보폴라사르(B.C. 605-562)의 아들이었던 그는 무적으로 일컬어지던 앗수르를 무너뜨리고 이번에는 강력한 라이벌인 애굽 군대마저 꺾은 뒤 명실상부 당시 중동 세계의 최강자로 등극하게 되는 카리스마적 정복자였다. 그는 뛰어난 장군이었을 뿐 아니라 대단한 국가 경영 리더십을 가졌던 군주로서 관제를 정비하고 궁전과 저수지 대운하 등을 건설하여 위대한 바벨론 제국의 틀을 놓은 인물이다. 모든 피정복국에서 젊은 엘리트 인재들을 포로로 데려와서 최고의 시설에서 훈련시켜 국가의 중요 요직에 골고루 등용했다. 이 중에서도 유다에서 끌어간 포로 출신의 다니엘을 최고 국정 운영 책임자인 총리에 발탁할 정도의 파격적인 인재등용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느부갓네살 같은 뛰어난 통치자가 있어 훗날 페르시아에 멸망당하기까지, 바벨론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치하게 된다. 열왕기하 242절의 갈대아인들은 이 신바벨론 제국의 백성을 가리킨다. 장차 유다 왕국은 바벨론 역사상 최고의 제왕으로 일컬어지던 바로 이 느부갓네살의 손에 최후를 맞게 된다.

 

6. 어쨌든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 이후 바벨론은 승승장구하며 이때껏 애굽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서진(西進) 정책을 거침없이 밀어붙일 수 있었다. 바벨론은 그 세력을 애굽 하수에서부터 유브라데스 강 하수까지 확장함으로써 애굽에 속했던 노른자 땅을 거의 다 장악했다. 이젠 애굽도 자기 본토에 갇혀서 바벨론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느부갓네살은 이 여세를 몰아 유다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의 제 1차 유다 침입 사건으로서 다니엘과 그 세 친구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도 이때의 일이다. 힘의 중심이 바벨론으로 이동해 버린 이상 유다도 빨리 배를 갈아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여호야김은 할 수 없이 3년을 죽은 듯이 엎드려 바벨론이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이 여호야김이 3년 후 돌연 바벨론을 배반해 버렸다. 무슨 연유에서 그같이 무모한 결정을 한 것일까? 사정은 이러했다. B.C. 602년경에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전진기지로 애굽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대 바벨론 역사 사료에 따르면 이때 애굽군의 필사적 저항이 만만치가 않아 공격에 실패하고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이를 지켜본 여호야김은 나름대로 판단하기를 그래, 아직은 애굽이 더 강한가 봐하면서 바벨론에게 등을 돌리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선지자 예레미야가 바벨론을 거역하지 말 것을 간곡히 권했지만 여호야김은 친애굽파의 말을 듣고 입장을 정리해 버렸다. 여호야김으로서는 나름대로 상황을 보고 영리한 승부수를 던진 셈인데 이것이 바둑으로 치면 치명적인 패착(敗着)이 되어 버렸다. 애굽은 완전한 의미에서 바벨론을 이긴 것이 아니었다. 죽기 살기로 싸워서 간신히 자신들의 본토를 지키는 방어전에 성공한 것뿐이었다. 동시에 바벨론은 애굽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놔두면 서서히 죽어갈 적을 무리하게 치느라고 아까운 병력 손실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전략적으로 철군한 것뿐이었다. 따라서 애굽은 멀리 팔레스타인까지 병력을 보내 여호야김을 도와줄 여력이 없었지만, 바벨론은 애굽 본토 공략에 실패했다고 해서 유다 왕국 정도를 치지 못할 정도로 약해져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빈틈을 타서 금방 애굽 쪽에 붙어 버린 여호야김의 배신이 바벨론의 분노를 더욱 자극해 버렸다. 느부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의 갈대아군 본대와 함께 유다 변방의 아람, 모압, 암몬 족속들의 연합군까지 총동원하여 괘씸한 유다의 숨통을 끊기 위해 몰려왔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한 유다 왕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하나님은 이사야, 미가, 훌다, 하박국, 예레미야 등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유다의 멸망을 경고하셨다. 그러나 왕들은 이 경고를 하나같이 무시했다. 특히 므낫세는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 죽이기까지 하는 잔혹함을 보였고 여호야김도 예레미야를 토굴에 가두기까지 했다.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왕들의 전횡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셨다. 특히 여호야김이 선대왕들의 악한 행위를 계속 이어 가자 하나님은 경고하신 대로 수많은 악한 정복자들과 이방 민족들을 보내서 유다를 징계하셨다. 예루살렘은 멸망 직전까지 가도록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어리석은 왕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의 포로가 되어 쇠사슬에 묶인 비참한 모습으로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느부갓네살은 이때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성전 기구들을 모두 바벨론으로 가져가서 바벨론 신당에 보관해 두었다. 훗날 벨사살 왕은 이 기구들을 가지고 술잔치를 벌이던 중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고 멸망하게 된다.

 

7. 유다의 19대 임금은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B.C. 598)이었다. ‘여고냐라고도 하는 이 여호야긴은 왕이 되어 딱 세 달하고도 열흘을 다스렸을 뿐인데 그 짧은 기간 동안 어리석고 악한 아버지 여호야김의 모든 악한 행위를 그대로 따라했으니 기가 찰 일이었다. 결국 그는 재위 100일 만에 바벨론의 제 2차 유다 침공이라는 재앙을 만났다. 이미 선왕 여호야김 때 다국적군을 동원하여 유다를 공격한 바 있는 느부갓네살이 이번에는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것이다. 그래서 여호야긴도 아버지처럼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된다. 왜 이미 한번 점령했던 예루살렘을 바벨론은 또 공격한 것일까? 그 답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열왕기에 기록된 연대상의 문제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선왕 여호야김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간 때가 이미 밝혔듯이 B.C. 602년이면 그리고 18세의 아들 여호야긴이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어 100일밖에 못 다스리고 다시 바벨론의 2차 침공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면 바벨론의 2차 침공 시일(B.C. 5973)과 연대적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여호야긴이 유다를 다스리게 된 것은 부왕 여호야김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직후가 아니라 그로부터 약 5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끌려간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석방되어 돌아와 다시 유다를 다스렸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돌아온 여호야김은 어리석게도 다시 한 번 옛날과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애굽과 다시 동맹을 맺고 바벨론에 저항했던 것이다. 이에 격분한 느부갓네살이 이번에는 직접 대군을 몰고 유다 왕국을 응징하러 나선 것이고 이것이 바벨론의 2차 유다 침입이었다. 바벨론의 유다 침입이 있기 직전에 왕위 계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호야긴이 그래도 100일이라는 기간 동안 왕위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벨론의 대군이 준비를 갖추고 출동하여 예루살렘까지 오는 데 걸렸던 시간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벨론군은 변덕이 죽 끓듯 하던 선왕 여호야김을 먼저 처형하고 이번에는 아들 여호야긴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고 간다. 여호야긴은 나이 든 모친까지 앞세우고 나가서 느부갓네살의 동정을 사보려 했지만 오히려 모친까지 다 포로가 되고 말았다. 아마도 여호야긴이 비록 직접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과 손을 잡지는 않았다 해도 아무래도 부친 여호야김의 배신으로 마음이 상해 버린 느부갓네살의 분노가 컸던 탓인 것 같다. 이렇게 끌려간 여호야긴은 바벨론 감옥에서 무려 37년간이나 갇혀 있게 된다. 그러나 훗날 알게 되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유다 왕조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 기가 막힌 축복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생을 단편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 바벨론의 2차 침입 때도 유다의 노른자와도 같은 고급 인력들이 수없이 많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이 중 에스겔 선지자와 모르드개 에스더 왕후의 사촌 오빠도 끼어 있었다. 이렇게 끌려간 포로가 1만 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모두 국가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뛰어난 군인들이거나 기술자나 학자들이었기에 유다가 입은 손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렇게 국가의 핵심 노른자 인력을 싹쓸이해서 포로로 데려가 버림으로써 바벨론은 유다의 남아 있는 자들의 힘을 약화시켜 다시는 감히 바벨론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훌륭한 인재들이 나라 밖으로 이렇게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리는 것은 나라의 운명이 끝난다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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