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모음
1.1 이 모든 충성된 일을 한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점령하고자 한지라 2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3 그의 방백들과 용사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성 밖의 모든 물 근원을 막고자 하매 그들이 돕더라 4 이에 백성이 많이 모여 모든 물 근원과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이르되 어찌 앗수르 왕들이 와서 많은 물을 얻게 하리요 하고 5 히스기야가 힘을 내어 무너진 모든 성벽을 보수하되 망대까지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 다윗 성의 밀로를 견고하게 하고 무기와 방패를 많이 만들고 6 군대 지휘관들을 세워 백성을 거느리게 하고 성문 광장에서 자기 앞에 무리를 모으고 말로 위로하여 이르되 7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를 따르는 온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가 그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8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말미암아 안심하니라 9 그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그의 온 군대를 거느리고 라기스를 치며 그의 신하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유다 왕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무리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0 앗수르 왕 산헤립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예루살렘에 에워싸여 있으면서 무엇을 의뢰하느냐 11 히스기야가 너희를 꾀어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하거니와 이 어찌 너희를 주림과 목마름으로 죽게 함이 아니냐 12 이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거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다만 한 제단 앞에서 예배하고 그 위에 분향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13 나와 내 조상들이 이방 모든 백성들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모든 나라의 신들이 능히 그들의 땅을 내 손에서 건져낼 수 있었느냐 14 내 조상들이 진멸한 모든 나라의 그 모든 신들 중에 누가 능히 그의 백성을 내 손에서 건져내었기에 너희 하나님이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15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꾀임을 받지 말라 그를 믿지도 말라 어떤 백성이나 어떤 나라의 신도 능히 자기의 백성을 나의 손과 나의 조상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였나니 하물며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겠느냐 하였더라 16 산헤립의 신하들도 더욱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종 히스기야를 비방하였으며 17 산헤립이 또 편지를 써 보내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욕하고 비방하여 이르기를 모든 나라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내 손에서 구원하여 내지 못한 것 같이 히스기야의 신들도 그의 백성을 내 손에서 구원하여 내지 못하리라 하고 18 산헤립의 신하가 유다 방언으로 크게 소리 질러 예루살렘 성 위에 있는 백성을 놀라게 하고 괴롭게 하여 그 성을 점령하려 하였는데 19 그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비방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사람의 신들을 비방하듯 하였더라 20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21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낯이 뜨거워 그의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의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22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주민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사 사면으로 보호하시매 23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께 드리고 또 보물을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드린지라 이 후부터 히스기야가 모든 나라의 눈에 존귀하게 되었더라
2. 평소 악한 일을 많이 했거나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준비 못한 사람에게 재난이 닥치면 우리는 ‘올 것이 왔다’거나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한다. 하지만 전혀 반대의 경우가 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는데도 부지런히 일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탁월한 리더십을 계속 발휘했는데도 뜻하지 않는 재난이 닥치는 때가 있다. 이런 경우는 본인이나 지켜보는 타인이나 참으로 마음이 힘들다. 재난의 이유가 해석이 안 되고 납득이 안 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그 재난이 도저히 상식적으로 돌파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라면 모두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어려운 일은 노력하면 해결할 수도 있지만 불가능한 일은 그냥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끝은 바로 하나님의 시작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 이런 큰 역경이 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 바로 뒤에 붙어 온다는 뜻이다. 이 축복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드려지는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 풀어놓게 한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지도자 히스기야에게 닥친 엄청난 위기와 그리고 기적 같은 승리에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히스기야가 행한 ‘모든 충성된 일’을 살펴본다. 역대하 32장 1절은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스럽게 나라 일을 했는지 알려주는 말이다. 앞서 성전을 정화하고 예배를 회복시킨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 히스기야의 개혁은 계속된다. 그는 먼저 유월절을 회복시켜 모든 백성들이 그들을 항상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새롭게 인식케 했다. 이를 계기로 성전 예배가 살아났고 이를 통해 신앙에 근거한 지속적인 개혁이 이뤄졌다. 히스기야와 백성들은 나라 곳곳에 있는 우상 주상을 깨뜨리고 우상 신전들을 없앴다. 성전 제도를 재정비하여 영적 지도자들이 자기 직무를 다시 하기 시작했고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다. 물론 히스기야 전에도 몇몇 좋은 왕들이 있어 부분적 개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완전하게 헌신적으로 삶의 모든 구석구석을 말씀 중심으로 개혁한 왕은 없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5-6)고 했다. 여기서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를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히스기야가 항상 하나님을 꼭 붙잡고 순종하며 따랐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형통의 축복 즉 뭘 하든지 잘되게 해 주신다.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사람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왕하 18:7-8).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지도자는 강하고 당당하다. 당시 유다는 강대국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 있었는데, 두 나라 모두 상업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 있는 유다를 지배하고 싶어 했다. 이 와중에 항상 유다 왕들은 앗수르의 세력을 무서워하여 아부하고 조공을 바쳐 왔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이제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배척하고 나선 것이다. 또한 친 앗수르 정책을 취하며 항상 유다를 못살게 굴던 블레셋을 쳐서 그 지경을 넓혔다. 막강한 대제국 앗수르에 대항하여 이처럼 히스기야가 과감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모든 일에 성공과 형통함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인생 앞에 태산 같이 버티고 있는 앗수르가 있는가? 앗수르를 두려워하지 말라. 앗수르와 타협하지 말라. 세상의 권력에 아부하지 말라. 세상 권력과 연줄을 대서 어떻게 살아남아 보려고 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당당해지라. 사실 말이 쉽지 당당해지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다.
3. 열왕기하 18장에 보면 히스기야 제위 4년째 되던 해 앗수르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했다. 국운이 걸린 전쟁이라 이스라엘 국민들은 3년을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마침내 앗수르에게 항복하고 만다. 이로써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고 왕과 귀족들은 다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군사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는 저희가 그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치 아니하고 그 언약을 배반하고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모든 명한 것을 거스려 듣지도 아니하며 행치도 아니하였음이더라’(왕하 18:12). 그들은 말씀에 불순종했으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우상들을 마구 섬겼으며 모세를 통해 명하신 하나님의 법을 듣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이같은 죄악이 몇 백 년 동안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심판의 날이 임한 것이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손에 쓰인 심판의 칼이었을 뿐이다. 국가의 운명은 군사력이나 외교정책 경제력에 달려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앗수르가 강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게 아니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숭배하고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은 죄가 이스라엘에 겹겹이 쌓여 하나님의 보호막이 걷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선이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 얼굴을 향하여 들지 않으셨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도 정신 차리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건방진 인본주의는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반드시 심판하신다.
4.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했다. 북쪽의 형제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당한 뒤 남쪽 유다의 히스기야가 계속 반 앗수르 정책을 고수하자 앗수르 대군은 바로 남하하여 유다를 침공한다. 이때가 히스기야 왕 재위 14년이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의 대군은 파도와 같이 몰려와서 주변 여러 나라들을 복종시키고 블레셋의 성읍들도 휩쓸어 버렸다. 여로보암 때부터 요새화된 요충지 라기스도 점령하고 에그론 왕을 해방시키더니 아프리카의 강국 애굽과 에티오피아 연합군까지 격퇴시켰다. 이 싸움에서 산헤립은 유다의 46개 성읍을 점령하고 20만이 넘는 포로들을 잡아갔다. 무시무시한 공성 장비를 가진 앗수르 대군의 침략 앞에 유다는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했다. 사정이 너무 급하니 처음엔 히스기야도 조공을 바쳐 앗수르를 달래려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왕하 18:14)하면서 비참하게 앗수르 왕에게 용서를 빌었다. 이에 앗수르는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라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요구했고 이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히스기야는 왕궁의 보물은 물론 성전 문에 입힌 금까지 다 벗겨내서 주었다. 성전 창고와 국고에 보관되었던 보물은 이미 십여 년 전에 선왕 아하스가 다 탕진해 버렸기 때문이다(왕하 16:8). 그토록 하나님을 잘 믿던 젊은 왕 히스기야도 인간적 공포에 눌렸던 것이다. 한 번 제대로 기도도 못 해보고 나라의 재정을 다 털어서 앗수르를 회유해 보려 했다. 사정이 너무 다급해지면 하나님의 사람도 본능적으로 인간적 수단에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앗수르는 챙길 재물을 다 챙긴 다음에도 약속을 어기고 거침없이 대군을 몰아서 진격해 왔다. 아예 이스라엘에 이어 유다도 완전히 멸망시키겠다는 심사였다. 강대국과의 외교 국방은 결코 돈으로 문제 해결하지 못한다. 앗수르는 절대 그렇게 해서는 물러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쉽게 가려 하면 안 된다. 돈은 돈대로 뺏기고 당할 것은 다 당하게 된다. 수치는 수치대로 당하게 된다.
5. 처음에 한번 마음먹고 나라를 잘 경영해 보려던 경건한 왕 히스기야로서는 기가 막혔다.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대하 32:1) 즉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열심을 가지고 그토록 나라를 거룩하게 개혁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런 국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신앙이 성숙치 못한 사람은 당장 시험 들 수도 있고 좌절할 상황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했는데 하나님이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는가?’라며 항변할 수도 있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환난은 온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에게 섭섭한 감정은 품지 말아야 한다. 믿음의 사람에게 오는 시련은 하나님의 더 크신 영광을 보여 주기 위한 찬스, 단서,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잠잠히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주님 주시는 마음으로 담대히 그 시련에 맞서야 한다. 히스기야는 일단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했다. 먼저 성 밖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물 근원을 차단했다. 앗수르 대군이 몰려와서 성을 포위할 경우 그들에게 식수(食水) 공급은 매우 중요할 것이었다. 그것을 차단해 버리면 장기전으로 가기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성 밖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물 근원을 막아 버린 것이다. 이때 히스기야는 예루살렘 성 밖 골짜기를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던 기혼 샘물을 막아서 지하를 통해 성 안쪽으로 흐르도록 하는 기발한 그리고 그 당시 기술로는 너무나 뛰어난 수로 공사를 단행했다. 1880년 독일인 기사 콘라드 식크의 발굴 작업으로 히스기야가 이뤄 낸 놀라운 공사의 실체가 드러났다. 식크의 리포트에 따르면 당시 히스기야가 판 지하수로는 S자 형이었으며 높이는 평균 2m 폭은 평균 80cm 총길이는 약 570m나 되었다고 한다.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수로 끝 부분에서 발견된 비문을 보면 일단의 일꾼들이 기혼 샘에서부터 파 들어오고 또 다른 일꾼들은 예루살렘 성안에서부터 파 들어가다가 두 그룹이 중간에서 만나면서 터널이 뚫리게 되었다고 한다. 첨단 건축 장비도 없는 당시 건축 시술로 어떻게 양쪽 땅속에서 파고 들어와 가운데서 정확하게 만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이 수로는 밖에서 볼 때는 막혀 있어 적군이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절묘한 설계로 지어졌다. 그리하여 이 수로는 예루살렘 포위 시 성안 사람들에게는 식수를 공급해 주는 주요 샘이었던 반면 적군에게는 식수 공급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성안에 만들어진 이 새 샘은 예루살렘 성 동남쪽에 위치했는데 훗날 저 유명한 실로암 못이 바로 이곳이다. 그 외에도 히스기야는 성을 튼튼히 쌓고 무기를 준비하며 지휘관들을 체계적으로 배치했다. 아주 철저한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한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부지런한 손을 통해 역사하신다. 한 손엔 삽을 한 손엔 말씀을 들고 나가야 한다. 이어서 히스기야는 백성들을 모으고 위로하며 격려했다. 지도자란 백성들을 야단치고 분열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지도자는 말로써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주는 사람이다. 그것도 개인적인 격려가 아닌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기초한 격려의 말을 해 줘야 한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앗수르 왕과 그 좇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하는 자가 저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저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인하여 안심하니라’(대하 32:7-8). 어떠한 어려움에 봉착해도 어떠한 강한 적을 만나도 해답은 똑같다. 우리와 함께하신 주님이 상대보다 훨씬 크고 강하심을 믿어야 한다. ‘저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훌륭하고 멋있는 말이다! 그분이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반드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다. 이것을 믿어 의심치 말라. 이때 백성들이 히스기야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고 했다. 잘되고 있어도 불안할 수는 있는 법이지만 어떤 위기 때에라도 하나님의 지도자는 믿음의 언어를 말한다. 그때 백성들은 안심한다. 믿음의 언어로 다른 사람을 안심시키는 성도가 되자.
6. 앗수르 왕 산헤립은 유다 백성들을 회유하기 시작한다. 산헤립의 유다 대침공 사건은 워낙 드라마 같아서 역대하 본문뿐 아니라 열왕기하 18-19장, 이사야 36-37장에서도 아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 본문들을 다 함께 비교하면서 이 사건을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예루살렘 남서쪽 48km에 위치한 라기스 성읍을 이미 정복한 앗수르 대군은 이곳을 예루살렘 침공의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거기서 전열을 정비한 산헤립의 대군은 성난 파도와 같이 예루살렘으로 몰려 왔는데 그들을 지휘하는 사람은 랍사게라는 왕의 심복이었다. 앗수르는 언변에 능한 랍사게를 앞세워 먼저 말로써 유다 백성들을 회유하여 항복을 받아내고자 했다. 랍사게는 자신을 맞으러 나온 유다의 대신들 앞에서 오만하게 큰 소리로 앗수르 왕의 메시지를 전한다. 10-15절까지 이르는 랍사게가 전한 앗수르 왕의 메시지 내용은 열왕기하 18장 19-25절에 더 자세히 나와 있는데 두 가지를 합쳐 보면 요는 대략 이렇다. 첫째, 유다에게는 의뢰할 자 즉 마땅히 도와줄 자가 없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포위된 주제에 누구에게 의뢰하겠느냐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구해 줄 것이라는 히스기야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랍사게는 유다의 국내 사정을 첩자를 통하여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아마 성 밖의 물을 막고 무기를 재정비하고 성벽을 다시 쌓고 군대 조직을 재정비한 히스기야의 준비도 대충 다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랍사게는 이런 노력도 막강한 앗수르 대군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을 것이라고 비웃는 것이다. 백성들이 자신의 지도자의 말을 불신하게 만들려는 그 의도가 사악하다. 열왕기하 18장 21절에 보면 앗수르를 견제할 수 있는 강대국인 애굽도 믿지 말라고 한다. 유다의 친 애굽 정책을 의식하고 한 말이다. 강대국이던 애굽도 당시는 랍사게가 말한 대로 ‘상한 갈대 지팡이’ 요즈음 말로 종이호랑이 같이 국력이 쇠약해져 있었다. 막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 앗수르에 대적할 만한 힘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둘째,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우상 제거와 거룩한 성전 개혁을 비난하면서 하나님이 결코 너희를 지켜 주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때까지 그 어떤 나라들이나 그들의 신들도 앗수르의 창칼을 대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랬다. 산헤립의 아버지인 사르곤 2세 때부터 시작된 앗수르의 정복 전쟁과 영토 확장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내로라하는 수많은 군사 강국들이 차례로 무릎 끓고 항복하거나 멸망당했다. 랍사게는 한술 더 떠서 앗수르군의 원정이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열방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 비꼰 것이다. 어쨌든 ‘너희들의 하나님도 너희들을 버렸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지켜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협박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에 취해서 감히 하나님을 무기력한 존재 자신들의 지원 세력 같은 존재로 격하시키고 모욕했다. 열왕기하 18장에 보면 이렇게 유다 백성과 하나님을 한껏 조롱하면서 항복을 종용하는 랍사게의 연설에 당황한 유다 사신들이 성 위의 백성들이 듣지 못하도록 ‘아람 방언’으로 대신 말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랍사게는 이 간곡한 소청을 한마디로 일축한 채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아주 거칠고 모욕적인 말로 대꾸한다. 포위전이 계속되면 너희들은 자기 대소변을 받아먹고 연명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랍사게는 아예 일어나서 성 위의 유다 백성들에게 직접 ‘유다 방언으로 크게 말한다’(대하 18:28). 세상 그 누구도 앗수르 왕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건질 수 없으니 히스기야도 믿지 말고 하나님도 의뢰하지 말고 속히 항복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아주 좋은 땅을 줘서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가만 보면, 앗수르가 랍사게처럼 유다 방언에 능통하고 무례하고 교활한 사람을 대표로 보내 이런 못된 말들을 한 의도는 간단하다. 먼저 백성들 마음에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고 이렇게 하여 히스기야와 백성들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항복하기만 하면 백성들을 좋은 땅으로 옮겨서 더 잘살게 해 주겠다는 거짓된 유혹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앗수르는 한 번도 점령지 백성에게 그렇게 관용을 베푼 적이 없었다. 점령지 포로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이주 정책을 실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다 낯선 땅에서 노예가 되어 평생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어 가곤 했다. 오늘날도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런 의도를 가지고 더럽고 교활한 회유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우리에게 알 수 없는 공포를 계속 불러일으킨다. 세상의 큰 힘을 보여 주며 우리가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기게 한다. 또한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와 백성들 사이에 자꾸 불화를 조장한다. 세상을 택하기만 하면 아주 잘살게 해주겠다는 거짓 유혹을 한다. 이때 우리는 정신 차리고, 이 모든 소리들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음성만 들어야 한다.
7. 히스기야 왕이 이사야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한다. 랍사게의 말을 들은 유다 사신들은 그 내용을 히스기야 왕에게 그대로 전한다. 열왕기하 18장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보냈던 사신들은 왕에게 랍사게의 말을 전하기에 앞서 옷을 찢으며 비통함을 나타냈다고 했다. 자신들의 조국과 왕을 그토록 업신여기는 앗수르의 무례함에 너무나 슬프고 분했던 것이다. 이들을 통해서 랍사게의 오만 방자한 협박의 말을 전해들은 히스기야는 이것이 자기와 백성들의 마음을 동요시키기 위한 계략임을 알아차렸다. 히스기야는 모든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어떠한 대꾸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여리고 성을 돌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한 취지와 비슷하다. 말의 힘이 무섭다. 적의 위협적인 말을 서로 퍼뜨리고 전하기 시작하면 살이 붙고 확대되어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부정적인 생각이 번져 나갈 수 있었다. 그것이 사탄이 의도하는 바다. 그래서 사탄은 랍사게처럼 위협과 부정적인 말을 하나님의 사람들 안에 집어넣으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반응하지 말고 침묵하며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히스기야는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가서 비상 기도에 들어갔다. 굵은 베를 입는다는 것은 큰 국가적 재난 앞에 리더가 스스로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리겠다는 의미였다. 왕의 모든 대신들도 다 굵은 베를 입고 같이 기도에 동참했다.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 기막힌 상황을 전하고 기도를 부탁했다. 그 부탁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에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사 37:4). 여기서 ‘견책하신다’는 말은 ‘꾸짖는다, 벌하다’는 뜻이다. 히스기야는 이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랍사게의 오만 방자한 말을 다 들어 알고 계심을 알았다. 그래서 이제 저 사악하고 막강한 어떤 인간의 힘으로도 건드릴 수 없는 저들을 하나님께서 꾸짖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큰 위기는 리더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신호다. 히스기야 왕의 전갈을 받은 선지자 이사야는 그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전해 준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사 37:6-7). 여기서 앗수르 왕의 ‘종들’ 이라는 말 표현에 주목하라. 이 말은 ‘철없는 것들’, ‘미성숙한 어린 애들’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막강한 앗수르의 왕과 장군들을 하나님은 ‘철없는 어린것들’로 보시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는 아무 힘이 없으니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앗수르 왕은 어떤 풍문으로 하나님께서 두려움의 영을 집어넣으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듣고 급히 본국으로 철수하게 될 것이며 거기서 그는 반역을 당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 앞을 태산처럼 가로막고 있는 문제를 하나님은 너무나 쉽게 해결하시겠다는 것이다. 아직 이뤄지지 않은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미래는 자신감 100퍼센트의 과거완료형이다. 그 말씀은 보증수표와도 같다. 환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위로와 격려의 음성을 들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히스기야가 얼마나 힘이 났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힘이 난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세상의 소리를 듣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힘을 얻길 바란다.
8. 앗수르 왕 산헤립과 그의 부하 대신들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하나님과 히스기야를 비방하는 심리전을 펼쳤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통첩을 담은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친서가 히스기야에게 전해졌다. 그 내용은 랍사게가 앞에서 한 말과 거의 흡사한데 요점은 자신의 손에서 건져낼 신이 없으니 빨리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평상시의 앗수르 같았으면 그냥 예루살렘 성을 향해 총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산헤립이 이토록 편지를 두 번씩 보내면서까지 히스기야의 항복을 종용한 데는 나름대로 속사정이 있었다. 구스 왕 디르하가가 앗수르를 공격하려고 군대를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것이다. 아프리카 구스의 사나운 군대는 앗수르도 만만히 여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다급해진 산헤립은 병력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시급히 유다의 항복을 받아 내고 구스와의 전쟁에 대비해야 했던 것이다(왕하 19:9). 그러나 이미 선지자 이사야에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협박에 쉽게 굴하지 않았다. 산헤립의 최후통첩을 받은 히스기야는 군대를 점검하거나 무기 창고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그 무서운 협박 편지를 그대로 여호와의 전에 가지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 놓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크리스천에게 근심거리는 곧 기도거리다. 당신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존재 가장 힘든 근심거리를 히스기야처럼 하나님 앞에 펴 놓으라.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라.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다시 한 번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려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열왕이 과연 열방과 그 땅을 황폐케 하고 또 그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나무와 돌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왕하 19:15-19). 이 히스기야의 기도는 사무엘하 7장의 다윗의 기도와 열왕기상 8장의 솔로몬의 기도를 연상케 한다. 위대한 지도자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다. 그들의 기도 주제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다. 개인적인 필요에서 시작하지만 항상 초점이 하나님의 영광에 맞춰져 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영광, 세상 그 누구도 훼방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한 산헤립을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벌해 달라고 기도했다. 자신들에게 구원을 베푸셔서 천하만국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목도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도 항상 하나님의 영광 중심이기를 바란다. 개인적인 필요도 있겠지만 꼭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과 연결되어야 한다.
9. 열왕기하 19장 20-34절에 보면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네가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하는 서론이다. 아무리 장황하게 기도해도 하나님 이 듣지 않으시면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은 그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라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들어주시겠다는 것을 뜻한다. 왕위에 오를 때부터 하나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하며 살아온 히스기야였다. 철저하게 준비하는 지도자 히스기야가 위기 앞에서도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엎드린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기도하는 히스기야를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그 막강한 군사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망할 것임을 예언하셨다. 우리가 너무나 겁먹고 힘들어하는 제국의 막강한 모습이 결국 아무 힘도 없는 허깨비라고 하셨다. 그 모든 권세를 허락한 것도 하나님이시며 이제 교만에 가득 찬 그들을 멸하실 이도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시고 시온에서 남은 자가 뿌리를 박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라고 하신다. 세상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세상이 너무 복잡해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영적인 시각에서 세상의 역사를 해석해야 한다. 그래야 기죽지 않고 답답하지 않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 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라. 그날 밤 여호와의 한 천사가 내려와 앗수르 진영을 쳤다. 열왕기하에 보면 하룻밤 새 앗수르 군사 18만 5천이 죽었다고 했다. 도저히 인간적으론 상상이 안가는 끔찍한 재앙이다. 물론 이것은 앗수르 군대 전체의 숫자는 아니다. 그러나 단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그 끔찍한 재앙으로 나머지 앗수르 군대는 공포에 사로잡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순식간에 썰물처럼 철수해 버렸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때부터 수십 년 동안 유다를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던 앗수르의 대군이 단 하루 만에 궤멸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한 번 움직이시면 우리가 수십 년 인간적으로 노력해도 안 되던 일이 순식간에 해결될 수 있다. 퇴각한 산헤립 왕은 그 후 20년 동안 한 번도 유다를 침공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부 반란으로 죽게 되는데 그 반역자들이 딴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들들이었으니 참으로 비참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정복자도 하나님의 때가 임하면 그토록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0-12).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지도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도 앗수르 침공 같은 큰 시련이 온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조공을 바쳤던 히스기야처럼 우리도 인간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소용없다. 정신 차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악한 세력들의 더러운 협박에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엄청난 외세의 침략에 맞서 히스기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적 조치를 취했으며 설교로써 백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하나님의 선지자와 함께 기도했다. 그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엄청난 적을 하룻밤 만에 물리쳐 주셨다. 우리도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엎드려 결사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앗수르를 물리침으로써 오히려 열방 앞에 위상이 높아진 유다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직면한 이 위기를 오히려 더 큰 기회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나님의 백성은 잘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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