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강림절기를 보내시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서는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고 증언합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또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 임마누엘로 성육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의하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성탄의 의미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임마누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Imm)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뜻이고, ‘아누’(anu)라는 말은 ‘우리와’라는 뜻이고, ‘엘’(El)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왜 우리는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열등감”입니다. 우리는 보통 열등감을 그다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있는 사소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열등감이 든다면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열등감이 들면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올바로 서 있으면 열등감이 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에 불만과 불평이 시작됩니다. 남과 비교하게 되면 아무리 가져도 만족함이 없고, 복을 받아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포도원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포도원 비유에서 보면, 하루 품삯을 다 받은 일꾼이 마지막 한 시간만 일하고 똑같은 품삯을 받은 사람을 보고 속이 뒤집혔습니다. 주인하고 나만 생각하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약속한 만큼 받은 것이고, 일자리를 주었기 때문에 감사할 뿐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열심히 일 합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에 묻어둡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처음에는 감사했겠지요. “주인이 나를 믿고 이 돈을 맡겨 주셨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인과 나와의 관계만을 생각하면 은혜인데, 그만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다른 종들은 2달란트, 5달란트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만 일할 맛이 안 생기고, 주인에 대한 불평만 늘어갑니다.
여러분, 이 시간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족하게 받았습니까? 가장 큰 은혜는 자신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인데, 이 사랑을 여기 있는 분들 중에 못 받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노진준 목사님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어서 늘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으셔야 합니다. 이분을 미국 코스타 집회에서 뵈었는데 그날도 지팡이를 짚고 설교단에 오르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릴 때부터 치유 집회가 있다고 하면 다 찾아 다녔다고 합니다. 기도하기를, 다리만 고쳐주시면 목사가 되어 평생 주님만 전하겠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서 기도 받아도 치유 받지 못하고, 낙심하고.. 그런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시절, 치유 집회 광고를 보고 또 참석했습니다. 집회 후에 강사 목사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강사 목사님께 묻기를
“정말 기도하면 모든 병에서 치유함을 받나요?” “그렇지.” “그런데 성경에 보면 바울은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는데 치료 받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울은 치료를 받았어.” “아니, 성경에 보면 치료 받지 못했다고 나옵니다.”그러자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길,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병을 주신 것이 오히려 좋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면서 다시는 같은 기도를 하지 않았어. 현재가 더 좋은데, 덜 좋게 해 달라고 기도할 사람이 누가 있겠니? 그때 바울은 치유 받은 거야.”
이 말씀을 듣고 노진준 목사님도 그 순간 자신의 다리를 치유 받았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불편한 다리로 전 세계를 다니며 말씀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혹시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열등감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기준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가장 사랑받기 원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꾸미고 감출 수 있어도 나에게 어떻게 나를 숨길 수 있나요? 그래서 열등감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감, 열등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을 믿으면 먼저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십니다.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이 본래 누구인가를 알게 되면 여러분의 인생을 얽매고 있는 것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열등감 외에도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붙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음란, 미움, 다툼, 시기, 두려움, 좌절 등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러분 각자가 여러분의 마음을 가장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죄의 문제에 대해 누구나 기도하고 결단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단하고 나면 다시는 동일한 죄를 짓지 않게 됩니까?
보통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육체의 죄성은 그대로 있습니다. 큰 은혜를 체험한 사도 바울도 베드로와도 다투었고, 바나바와도 다투었습니다. 죄성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를 당연하게 받아들여도 안 됩니다. 우리 안에 해결되지 않은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버립니다. 말씀을 읽어도 은혜가 안 되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점점 ‘속도’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교통수단이나 통신 정보 수단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라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속도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신 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1-2주면 갈 수 있는 가나안을 40년이 지나서야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빨리 들어가게 할 능력이 없어서 그러셨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속도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백 년간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 없이 서둘러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의롭게, 정결하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를 인도하실까요? 주님은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까지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핵심은 우리가 금이냐 은이냐가 아닙니다. 깨끗하냐 더러우냐입니다. 바울을 말합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2004년에 개봉한 “내 머리 속의 지우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정우성, 손예진 씨가 주연한 영화입니다. 아내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자꾸 하나씩 잊어버립니다. 그러자 남편이 메모지를 이용해 하나씩 집에 붙이게 되고, 결국 온 집은 메모지로 가득 차게 됩니다. 아내는 자신이 병에 걸려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남편과 헤어지려 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네가 기억을 잃어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괜찮아”라고 말합니다. 아내가 기억을 완전히 잃어서 병원에 있을 때, 남편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의 향수를 뿌리고 아내를 처음 만난 것처럼 데이트 신청을 합니다. 그렇게 기억을 잃은 아내는 다시 처음처럼 남편과 사랑을 시작합니다.
오래전 영화인데 종종 이 영화가 떠오릅니다. 영화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와 같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것처럼 종종 하나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시고, 다시금 새로운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들은 종종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잊어도 하나님은 새로운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첫사랑의 모습으로 프로포즈 하십니다. “나와 사귀지 않을래?”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막연히 2000년 전에 태어난 분이 우리 마음속에 계신다?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빛이 임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를 “빛”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 12:46)
요셉은 죽을 구덩이에 빠지고, 종으로 팔려가고, 감옥에 들어가는 기가 막힌 어려움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이해할 때, “요셉이 이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뎠더니 하나님께서 총리가 되게 하는 영광을 주시더라”라고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인들처럼 불행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미래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보상을 바라며 현재를 인내해야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이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낸 이유를, 요셉이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3)
언뜻 보기에 요셉의 상황은 사랑받는 아들의 신분에서 종의 신분으로, 심지어 죄수의 신분으로 갈수록 크게 변하는 것 같지만,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환경만 변했을 뿐 가장 중요한 것이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올바로 믿으면,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매일 매일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기념할 때에 2000년 전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예배하는 것에만 초점을 둬서는 안 됩니다. 2000년 전 역사적 사건도 분명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성탄절을 기념한다고 했을 때는 현재의 상태에서 기념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생신 때에, 아기 부모님의 탄생을 축하한다며 축하의 인사를 건네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현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종종 하나님을 잊고 살아갑니다. 마음을 열어 임마누엘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맞아들이십시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운 시간을 지날 때, 다가와 손잡아 주실 것입니다. 모든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림절을 보내는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과 일터와 삶의 자리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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