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교회력으로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 21주를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벌써 성령강림 후 절기를 20번을 보냈고, 오늘 21번째 주일이 된 것입니다.
성령강림 후 절기에서 주일 예배는 1차적으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합니다.”
오늘 교회 성서일과는 좀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 – 고난주간에 읽으면 좋을 말씀입니다. 오늘 성서일과 말씀은 대신 값을 지불함, 어려운 단어로 – 대속이 주제입니다. 대속은 기독교의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초점이 정확히 맞춰진 주일로 성령강림 후 절기를 다시 한번 정리하고 입니다.
교회에 가면 십자가를 보게 됩니다. 교회 외부를 보면, 십자가를 어느 형태로든 표현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교회 실내에도 십자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선물로 주기도 하고, 십자가를 집에 하나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저의 책상에 십자가가 2개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특히 교회는 십자가 사랑이 남다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 교회에서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당시 사형 방법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고통스러운 사형방법은 참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우연히 하나 하나 살펴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중 어느 것은 지금도 생각이 나는 사형방법이 있는데, 사형 방법 중 말만 들어도 트라우마가 생기는 사형법이 있습니다. 십자가 형은 사람들이 만든 사형 법 중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을 받은 사람은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죽여주는 것이 일종의 자비를 베푸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말도 되지 않겠지만, 십자가 형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받았을 때 무자비한 로마 군병들이 엄청난 폭행을 가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줄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형틀에서 죽어가는 사형수를 보면서 일종의 공포를 느낍니다. 죽을 때까지 너무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워 하는 사형수를 보는 것만으로 큰 공포를 받습니다. 그 공포 자체만으로도 식민지 공포 통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생명이 되고, 영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공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승리하고 성공하라고 십자가를 선물로 줍니다. 사람들은 좋은 선물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어 합니다. 좋은 방법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과정을 띄어 넘어서 주면 문제가 됩니다. 영광을 주고 싶은데, 십자가를 빼고 주면 문제가 생깁니다.
통상적으로 중년 하면 만 41-64세를 의미합니다. (만46세-만 64세로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중년이 되면 나이 드신 부모님과 그렇게 싸운다고 합니다. 특히 어렸을 때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었던 자녀들은 중년이 되면 나이 드신 부모님과 잘 싸운다고 합니다. 아무 말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부모님을 만나도 어느 순간 화를 내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어느 심리학자가 분석한 것에 의하면, 그것은 아주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중년이 된 사람이 어렸을 때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는 사람이었다면, 부모님은 자녀가 나름 고생을 덜하고 평탄한 길로 삶을 안내했고, 그 자녀는 그 길로 가면서 사회 생활을 나름 잘 적응하며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작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질 가능성은 낮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중년이 되면, 더 이상 나이 드신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도 되었고, 그러면서 이전에 자신이 결정하지 못한 눌러 놓았던 감정이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분명 자녀가 선택하고 싶은 길은 부모님이 볼 때는 십자가와 같이 어려운 일들이많아 보이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 때 부모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오늘 성경 본문은 하나의 지침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마가복음 10장 42절 ~ 45절은 한 사건이 전제된 가르침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5절 ~ 37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용기를 내고 직설적으로 주님께 부탁합니다. “주의 영광 중에 우리를 하나를 주의 우편에, 하나를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성경을 조금만 더 읽다 보면,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고, 다시 말해서, 그 영광에 동참하고 싶었고, 먼저 예수님께 말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냅니다.
이 때 주님이 사용하신 방법을 꼼꼼히 봐야 합니다. ‘나를 따라오라 영광을 얻을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예수님 자신이 정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제자들을 위로하면서 자신이 가야 할 길, 영광에는 대속의 죽음,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있음을 알려 줍니다. 주님은 영광만 보지 말고, 십자가와 섬김을 같이 보여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선택할 주님의 ‘영광’에는 섬김이 있어야 하고,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어야 얻는 영광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래도 이 영광을 선택할 것인가는 제자들 자신의 몫으로 돌려 준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십자가는 영광이라고 읽습니다. 사람은 영광을 바라보지만, 주님은 그그 영광에 앞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대속의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 교회에서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교회에서는 십자가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사역자들이 부르는 찬송 중에는 부름 받아 나선이 몸이라는 찬송가 323장이 있습니다. 그 찬송의 3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매우 무거운 다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은 주님이 존귀 영광 모든 권세만 가지고 가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멸시 천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 ~ 6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우리의 죄악 때문에 찔림을 당하고 상함을 당합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허물 있는 사람, 죄악 있는 사람의 죄악을 그가 대신 담당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53장 12절의 내용은 우리를 전율하게 합니다.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제가 군대 갔을 때 군대 선임이 저에게 말합니다. ‘죽었다 하고 군생활하라’고 합니다.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 죽는 척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편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는 척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죽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것도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화가 나면 복수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복수 때문에 더 힘들어 질 수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어느 한 형제와 상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은 아닙니다. 그 형제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이 고민이라고 상담을 합니다. 내용인 즉, 아버지가 자주 술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큰 수술을 1년 전에 받으셨는데, 그래서 술을 드시지 말아야 하는데, 자주 소주 2-3병씩 드신다는 것입니다. 술 드시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계속 드셔서 큰 싸움을 하게 되었고, 심지어 칼을 들고 아버지를 위협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자 그 형제는 자신이 예전에 끊었던 술을 아버지 앞에서 더 먹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먹는 소주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신다는 것입니다. 술을 이렇게 먹고는 이젠 집을 나와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더 술을 마시고 그 후에는 그 친구들과 거리로 나와서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여러 번 있자 과연 계속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하며 고민하고 저에게 상담을 요청한 케이스입니다.
지금도 집에서 술을 마셨고, 집에서 밖으로 나왔고, 나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그 형제에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특별한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속으로 기도하며, 그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많이 힘들겠다.", "정말 힘들겠다.", "정말 정말 힘들겠다." 그 청년의 삶을 공감해 줍니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혹 아버지가 미워서, 정말 아버지가 미워할 형제가 지금 그런 행동을 한다면, 아버지는 분명 속상해하고 형제가 원하는 복수는 매번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형제가 점점 더, 훨씬 더 망가진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포장되지 않습니다. 불편하면 반드시 반응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도 반응합니다. 죄는 사망으로 반응됩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죄는 죽는 척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가 사망으로 반응하는 것을 자신의 아들로 대신 값을 지불하고 용서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그리고 이 대속의 방법을 쓰실 때 쓴 도구가 있었습니다. 가장 흉악한 사형 도구 십자가.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라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 교회에서 십자가는 사명입니다.
선물을 받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고마워합니다. 이 고마움이 부담이 되어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누구나 선물은 마음을 열리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역 이용해서 뇌물을 주기도 합니다. 선물에다가 독약을 타서 주는 것입니다. 하여튼 선물을 크게 받으면 크게 받을수록 사람은 더 크게 마음이 열립니다.
누가복음 7장 41절 – 42절에 다음과 같음 말씀이 있습니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여기에 베드로가 말합니다. 자신의 생각에는 많이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이에 주님은 맞는 말이라며, 죄를 지은 여인에게 네(그 여인)가 나(주님)를 이 모든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는구나 말하며 알아봐 주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당하게 될 매우 민망한 상황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인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주님은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따뜻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가끔 ‘나의 죄는 해결될 수 없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습니다. 사실 누구도 죄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해결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은혜로 주십니다. 속죄 값을 받지 않고 주십니다.
요한복음 8장 1절 이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서 백성을 가르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묻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으로 말하면, 이 여자는 죽어야 하며, 당신도 동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대답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참 곤란합니다. 누구는 시험을 하고, 누구는 시험을 받지만, 그 시험에 도구가 된 여인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 때 주님의 행동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우선 주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 씁니다. 흥분된 상황을 생각하는 상황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 쓰십니다. 다시 생각하는 상황으로 만듭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모든 사람들이 다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묻습니다.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 여인이 말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이 때 주님은 이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이 여인에게 사명이 생깁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입니다.
우리도 십자가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젠 그 십자가로 생긴 생명을, 삶을 살아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사랑받은 자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용서받은 자는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복음(기쁨의 소식, 구원의 소식) 받은 자는 복음(기쁨, 구원)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강림 후 21번째 주일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하며 살아야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합니다.
십자가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대속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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