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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2021년 6월 13일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2021-06-13 12:59:23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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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 여러분에게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우리의 삶의 여정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본문 이사야 말씀은 포로 귀환시대를 배경으로 택한 백성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원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파사제국의 고레스 왕이 선민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귀환하도록 했습니다. 고레스의 등장은 세계만민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그 백성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하신 섭리였습니다. 자기 백성 구원자를 선민 가운데서 세우지 않으시고 이방인 가운데서 세우신 것은 아무도 항변할 수 없는 전적인 하나님 주권의 은혜에 속한 것을 밝힌 것입니다. 구원은 건너편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본문은 열방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만 앙망함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애굽 구스 스바가 이스라엘에게 굴복하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참 구원자이심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형상이 된 우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대상이 아니시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을 형상화할 수 없습니다. 새겨 만든 우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자와 하나님의 백성이 받을 결과물은 전혀 다릅니다. 보이는 유한한 존재인 우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들이 누릴 것은 영원한 수치입니다. 그러나 눈에 안 보이는 전능자 참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것은 영원한 영예와 아름다운 생명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섬겨야 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백성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세계만민이 당신을 바라고 섬길 수 있는 분명한 객관적인 계시 말씀을 주셨습니다. 자연과 역사를 통해 계시하시고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만민은 그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은혜를 베푸시기에 우리는 그의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 고레스 왕은 페르시아 동부에 위치한 소국 안산의 왕 캄비세스(Cambyses) 1세와 메대 왕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딸인 만다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주전 559년 부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민족 통합에 착수하여 전체 페르시아를 통치했고 9년 후인 주전 550년경에 외조부 아스티아게스 수하 장군이었던 하르파구스(Harpagus)의 도움으로 합병하기에 이릅니다. 다니엘 528절에 고레스를 메대와 바사 사람이라고 한 배경입니다. 그 후 서쪽으로 리디아(Lydia) 동쪽으로 파르티아(Partia)를 합병하고 주전 539년엔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을 무혈 정복하였습니다. 유다 백성은 주전 537년 고레스 칙령(1:1-4)으로 스룹바벨의 영도하에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고레스는 주전 530년경 제국의 북동쪽 변경에 위치한 맛사게타에(Massagetae) 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고레스보다 100년 앞선 시대를 살았던 이사야가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적 사명 감당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 사람이 바로 고레스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역사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초월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그의 백성을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신득의(以信得義) 복음 진리를 증언하며 복음의 능력과 효과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신득의가 필요한 근본 원인으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이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앞에 스스로의 의로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다는 전적인 무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통해 주님은 인류를 대표하여 죽으셨습니다. 죽으신 주님과 우리는 연합하였기에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도 살게 되었습니다. 이신득의 진리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은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성령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인간의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1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여야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은혜라고 하는 말은 구부리다’ ‘굽히다’ ‘아랫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다라는 의미입니다. 왕이 행차할 때가 되면 준비가 복잡하고 경계가 삼엄하며 왕은 고고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백성들 사이를 통과합니다. 그러나 가끔 왕이 가마에서 내려 비천한 백성의 손을 잡아주고 축복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일반 백성이 왕의 시선을 받으며 그의 몸에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왕의 마음을 은혜로 움직여 그 순간 행렬을 멈추고 손을 만지고 축복해 주실 때에 그 백성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성경학자 반하우스(Donald Barnhouse)위를 향한 사랑은 예배이고 이웃을 향한 사랑은 자비이며 허리를 굽힌 사랑은 은혜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는 자에게 호의와 친절을 보이는 것입니다. 은혜로 하나님께 용납된다는 것은 항상 행위의 문제와 심각하게 대조가 됩니다. 은혜를 말할 때마다 우리는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가 자연히 나옵니다. 은혜는 결코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호의를 베푸시는 하나님 편에서 선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자발적으로 호의를 베품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완전히 무료입니다. 갚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갚을 수도 없습니다. 은혜는 아무 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우리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영생의 선물을 받아들였습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 믿습니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인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보고 웃으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은혜 곧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은혜 아래에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 영광을 돌립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은혜는 다양합니다. 품위 단정 겸손 자비의 의미와 함께 다른 사람을 돌봐주는 마음 용서해주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입니다. 그것도 완전한 은혜입니다. 범죄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분명히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하셨습니다.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로 어린이들을 맞이하셨습니다. 은혜로 삭개오를 만나주셨습니다. 여인들 가난한 자들 세리와 사마리아인을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은혜였습니다.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향하여서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원망도 시비도 없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였습니다. 나 같은 자를 만나주신 주님 그분이 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율법도 완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지키려고 할수록 지킬 수 없는 무능을 경험하게 됩니다. 철저한 타락과 전적인 무능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죄 값을 치렀기 때문에 죄와 더 이상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기에 죄가 가져오는 사망 권세조차도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됩니다. 죄의 종이 되어 불법을 저지르며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내가,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사유하심을 받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었고,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자유함 속에 있습니다. 바울은 죄의 지배를 이기고 은혜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6:3,6,9). 세례의 어원 밥티조(baptizo)는 원래 동일화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1세기에 옷감에 염색하여 물을 들이는 모습을 의미했습니다. 물감에 옷감을 담그는 행동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천이 일단 빨간 물에 들어가기만 하면 원래 색깔을 잃어버리고 빨간색으로 변합니다. 정체가 바뀌게 되는 이런 담금질을 밥티조(baptizo)라고 불렀습니다. 이 헬라어에서 지금의 세례(baptism)가 유래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를 위하여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주의 죽음과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앞에서와 같이 담금질되어 우리의 정체는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느끼지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왔을 때 우리는 그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었고, 그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되었으며, 그분의 새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능력 있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동일시함으로써 그분의 능력은 내 것이 됩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 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8-10). 주님과 하나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노예처럼 끌려 다니지 않고 살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이미 과거의 사건입니다. 모든 것이 처리되었습니다.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아래에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방을 선언하심으로 우리는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의 권능에 대해 죽었으므로 우리는 새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껏 섬기는 자유를 찾았습니다.

 

대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거하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 아래 율법아래 자기 의()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음을 확신하며 은혜의 자유를 누리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성령의 역사는 내 안에서 내 곁에서 그리고 내 위에서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입니다. 죄가 주인이 아닙니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용기 있게 하십니다. 자유케 하신 은혜 아래에 살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가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법적인 연합에 의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연합에 의해서는 그리스도 십자가 구속의 효과가 실제적으로 우리 개개인에게 적용되어 영적으로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아난 중생한 영적 의인이 되었습니다. 첫 아담을 인하여 죄의 전가를 받아 죄인인 인간이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법적으로 영적으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영적 의인으로서 성도는 죄의 세력 곧 공중 권세 잡은 자 사단의 세력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화의 근거이며 그리스도인이 하루하루 성령의 교통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성령은 내 안에서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내 곁에서역사하십니다. 성령은 그리고 위에서 임하셔서강력한 능력으로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십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의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부패한 죄성을 지닌 인간입니다. 공중권세 잡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마땅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성화는 구원받은 자가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의인되었음을 자만의 요소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공격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영적 훈련과 전투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쳐서 십자가에 복종시키는 일을 꾸준히 감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인간의 스스로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셔야 가능합니다. 성령 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죄에 대해서는 자유 하지만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여전히 종입니다. (둘로스)은 스스로 헌신하여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의 종입니다. 죄의 종노릇은 멸망이지만 의의 종노릇은 거룩을 이루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 하나님의 종이 된 성도 여러분은 오직 성령의 강력한 임재하심 역사하심 동행하심 속에서, 그 성령의 은혜 아래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1).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로 죄에서는 자유하고 성령의 강력한 능력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서는 의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하며 옛 자아로부터 자유하며 성령의 능력을 받아 새 삶을 살려면 우리는 성령이 필요합니다.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 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13-14). 이제 우리가 자유를 얻었으니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은혜아래 의의 병기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도 싫어합니다. 악한 세력은 할 수만 있다면 즉시 은혜를 소멸시키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가 스스로 노예라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속이려는 전략을 꾸밉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방된 사람 의의 종으로 살기 시작하면 그 옛 주인은 더 이상 우리를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초월적이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령한 성령의 역사로 모든 악한 세력을 물리쳐 주시고 우리 안에 우리 곁에 우리 위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주님 안에 거하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변화가 쉽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옛 습관을 떨쳐버리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어디 마음먹은 대로 변화가 되시던가요? 올바로 사고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은혜 아래에 있기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거기다가 우리의 원수 마귀는 쉽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마귀에게 쓰임 받는 율법주의자들도 끈질깁니다. 전쟁이 끝나고 노예가 해방되었지만 지주(地主)들은 여전히 노예들을 부려먹으려고 했듯이 오늘날 은혜를 부정하는 자들은 점점 더 완고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원수들은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다는 이 복음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은혜를 증오하고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노예의 신분과 무지의 늪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유와 은혜의 자리로 걸어 나오는 데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충족히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링컨이 말합니다. ‘고래의 등에 작살을 꽂기는 했으나 그것을 온전히 육지까지 끌어 올리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꼬리를 한번 휘두르면 배가 파선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좋은 소식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 괴물에게 작살을 꽂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은혜 아래로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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