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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2021년 5월 30일 <내가 누구이기에>
2021-05-30 14:46:36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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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바벨론 포로 애굽의 억압과 같은 짓누름의 재난이 우리의 삶에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택한 백성을 부자유함에서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구원역사 방향을 믿고 이 어려운 시국에서 자유케 하실 날을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해내시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맡을 평범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놀라운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누구를 택하셔도 하나님께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느리고 지식도 부족한데다 뒤처지고 작고 가난한 사람을 택해서 놀라운 하나님 크기의 일을 성취하게 하시길 좋아하십니다. 인간은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과 일하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며 하나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 받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거친 들에서 예수님 오심을 선구자로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하나님은 크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잠시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있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건축물을 짓느라 낮이나 밤이나 힘든 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애굽 계획을 세워두셨습니다. 그런데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의 지도자에게 가서 이 계획을 말하고 백성들을 해방시키도록 요구할 대언자가 필요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인도할 사람으로 누구를 택해야 하겠습니까? 후보자 선정 기준으로 어떤 스펙을 정해야 할까요? 적어도 말을 더듬는데다 자존감마저 낮은 양치기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애굽 간수를 죽이고 바로의 눈을 피해 오랫동안 도망쳤던 노인을 택할 리는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설마 이런 사람을 택하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이야기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도록 모세를 초청하셨습니다. 주위를 바라보는 모세의 시선 끝에는 불붙은 가시떨기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나무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타 올랐습니다. 궁금해진 모세는 무슨 일인지 살펴보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갑자기 불꽃 가운데서 천둥 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모세야 모세야모세는 가던 길을 멈췄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셨습니다. 모세를 찾는 일쯤은 하나님께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굳이 인터넷에서 검색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은 모세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아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을 뜻하는 호렙 산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저 자신이 먼지만 풀풀 날리며 하루하루 흘러가는 세월만 바라보면서 가축을 이끌고 홀로 광야를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양을 돌보는 그 근처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일꾼으로 초청받으리라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만남의 순간은 모세의 삶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모세야 네 신을 벗으라.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모세는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즉시 신을 벗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자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풀어놓으셨습니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당하는 고통을 분명히 보았다. 그들이 고통 속에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들의 근심을 알고 있다. 내가 내려가서 애굽인의 손에서 백성을 구하고 아름답고 광활한 땅으로 인도하겠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내게 미쳤으며 애굽인들의 박해도 보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보았다 내가 들었다 내가 알고 있다 내가 내려가겠다 내가 하겠다.’ 하나님은 이미 마음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의 땅은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비록 여러 족속이 성벽을 세우고 도시를 지키며 이방인들을 위협하고 있지만 무시무시한 족속들이 거기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곳을 그의 백성에게 주실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 없는 크신 분입니다. 혼자서 다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 뜻대로 백성을 인도할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숨 쉴 틈도 없이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겠다.’ 놀라운 일을 하시려는 하나님이 별 볼 일 없는 노인을 사용하겠다고 하십니다. 어찌되었든 라는 1인칭 대명사는 사라지고 이 갑작스런 명령에 모세는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이제 가라.’ 혼란스럽고 당황한 모세가 엉겁결에 말합니다. ‘제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능력을 훨씬 벗어난 일을 시키신다면 우리도 모세처럼 머릿속이 복잡할 것입니다. 하나님 진심이십니까? 농담이시죠? 다른 사람과 저를 착각하신 게 아닌가요? 설마 제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저요? 뭘 하라고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가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라.’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리라고 생각하신 게 아닙니다. 그들을 노예로 구속하는 결박을 끊을 능력이 모세에게 있다고 믿으신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고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지도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분은 결국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모세가 아닙니다. 모세에게 명하신 가라라는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네가 있든지 없든지 내가 하겠다. 그러나 내겐 좋은 동역자가 필요하다. 내가 말한 대로 행한다는 사실을 믿는 평범한 사람을 찾고 있어. 넌 내가 세워놓은 계획에 동참하기만 하면 돼. 내가 했던 약속은 이루어지고 있다. 내 계획은 진행 중이야. 내가 가는 것을 보아라. 내가 하는 말에서 빗겨가지 말아라. 나를 신뢰해라.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 사실 난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도구로 사용할 거다. 목적을 위해 나를 대신할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필요해. 네가 바로 그 사람 내가 택한 사람이다. 모세야 이제 가라!’ 모세는 그 마지막 말만 들은 것입니다. ‘이제 가라!’

 

모세의 입에서 갖가지 질문과 의심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주님 저는 말주변이 없는 걸요? 저보고 바로에게 가라는 말씀입니까? 어떻게요? 절 죽일지도 몰라요!’ 하나님은 그 사소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 할 수 있다 훈련 센터에 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할 수 있어 모세야! 너를 믿는다. 네 자신을 믿어봐라며 자존감을 북돋우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짧게 간단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하나님이 우리가 하기엔 너무 커 보이는 임무를 맡기면서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초대하실 때는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들려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모세에게도 이렇게 대답하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네 자신이 누구인지는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함께한다는 사실만 보거라. 내가 함께할 테니 나를 신뢰해라.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다.’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 보였으나 모세는 주저하거나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떨기나무가 타오르고 거룩한 음성이 주위에 울려 퍼졌습니다. 맨발에 떨리는 몸으로 모든 용기를 다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물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 간다고 해서 그 백성이 즉시 그를 신뢰하겠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자신을 애굽에 보낸다고 하시며 그와 함께하겠다는 분이 누군지 알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광야에서 당신과 이야기했다는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지요?’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분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높은 신이라는 뜻인 여호와라고 불렸습니다. 선조들은 그 이름을 너무나 두려워하고 경외한 나머지 이름을 전부 적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줄여서 모음으로만 적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이름은 그분을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스스로 있는 자 그게 내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세의 뇌리에 정확히 자리 잡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지 모릅니다. 정말 놀라운 이름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스스로 있는 자’(I AM)라는 단어는 하야입니다. 발음하려면 목 깊은 곳부터 소리를 내야 합니다. 큰 소리로 무술 기합을 넣는 모습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야라는 말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습니다. 영어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을 번역하면 존재하다’(to be)이다. ‘있다’(be)라는 말도 됩니다. 스스로 있는 자(I AM)는 모든 것 되신 분(I BE)입니다. 문법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도 신학적으로는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세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이십니다. 이 말은 문법적으로 현재 능동형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은 변치 않고 지속적이며 끝이 없고 한결 같으며 언제나 하나님이신 그분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의 중심이다. 나는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나는 모든 만물의 소유자다. 나는 주인이다. 나는 생명의 창조자며 유지자다. 나는 구원자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 나는 소멸되지 않으며 측량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크다.’ 하나님이 크심을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우리는 너무 작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미미한 존재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 되시는 크신 분이라고 깨달은 모세는 자신의 이름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것 되신 분’(I AM)이라면 모세의 이름은 아무것도 아닌 자’(I am not)입니다. ‘나는 중심이 아니다. 나는 주도권이 없다. 나는 해결책이 없다. 나는 전지전능한 능력이 없다. 나는 지배권이 없다. 나는 소유권이 없다. 나는 주인이 아니다. 내 이름도 여러분의 이름도 모두 똑같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 내 이름은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 나는 우두머리가 아닙니다. 나는 책임질 권리가 없습니다. 나는 창조자가 아닙니다. 나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나는 통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전능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겐 사람이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 이름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 아직 어안이 벙벙한 모세에게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3:15). 하나님이 변함없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이름도 모든 세대에 걸쳐 동일한 것임을 모세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 되십니다. 하나님은 크십니다.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 되십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때 우리는 그만큼 더 자유하게 됩니다. 나 자신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 경험이 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캐나다 쪽에서 관람한 적이 있는데 절벽 밑에 굴을 통해 폭포 물이 떨어지는 지점까지 가서 구경하게 되었는데 그 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제가 들어 본 중에 가장 놀라운 소리였습니다. 지축을 흔드는, 지구를 흔드는 소리 영혼의 묵직함을 느끼게 하는 소리였습니다. 이 소리는 정말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세계에서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미약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작은 나를 기억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셋째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크신 하나님께 광대하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길 때에 우리가 참으로 자유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지 같은 우리가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질 때 참 자유 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그분의 크기만큼 사용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의 모든 짐을 기막히게 크신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초라한 나를 부풀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작음과 그분의 광대하심을 알 때 우리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게 될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께 붙들린 자로서 참 자유를 누리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등장하여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들었고 요단 강가에서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세례요한의 명성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궁금해진 지도자들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살벌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상징으로 일하셨던 당시 400년간은 선지자도 없었고 그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오직 침묵뿐이었습니다. 유대 민족은 로마 제국의 압제에 눌려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그가 드디어 나타나는 듯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례요한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요단 강가로 수많은 군중을 끌어 모으고 있었습니다. 인기로 따지면 아이돌 이상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요한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주목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신임을 얻고 영광을 누리고 머리기사를 장식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평범한 선지자였던 세례요한 주위에는 그에게 헌신하며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를 보기 위해 찾아온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누군지 설명해 보시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크다고 자랑할 수 있는 기회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례요한이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1:20).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이 주인공이 될 것인가 다른 사람이 조명을 받게 할 것인가 결정하는 순간에 세례요한은 자신이 부름 받아 섬겨야 하는 분이 크다는 사실과 자기는 지극히 작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I am not the Christ). 세례요한은 자신의 이름이 아무것도 아닌 자’(I am not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세례요한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그에게 찾아온 바리새인들이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라면 어째서 세례를 주는 거요?’ 세례요한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고 있소.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계신다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난 그분의 신발 끈을 풀만한 자격도 없지요.’ 세례요한이 한 말을 이렇게 풀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찾고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나 나는 그가 아니오.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많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지만 나는 아니오. 나는 그가 받으셔야 할 관심이나 영광을 조금도 취하지 않겠소. 그가 어떤 분이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찾고 있으나 나는 그가 아니오. 나는 연극에 등장하는 작은 목소리 연기자에 불과하오. 광야 한 가운데서 외치는 나팔수밖에 안 되오. 준비하시오. 메시아가 올 것이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 정도의 가치도 없는 사람이오. 나를 그분으로 착각하지 마시오. 내 이름은 아무것도 아닌 자이고 여러분이 찾는 분은 모든 것 되신 분(I AM)이라오.’

 

다음날 세례요한이 요단 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데 예수님이 그를 향해 다가오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심장이 멈추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 짐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모든 것 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인간을 향한 은혜의 선물을 통해 우리를 품에 안고 하나님 자신에게로 초청하셨습니다. 자기에게 향하던 시선을 일순간에 예수님에게로 향하게 했습니다. 먼지 같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기에 광대하신 하나님의 섭리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참으로 자유함을 얻은 세례요한입니다. 이제 세례요한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났습니다. 군중 속에서 예수님을 지켜보는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세례요한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분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집중한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30).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자신보다 뒤에 오시지만 사실은 이미 계셨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중심 무대를 내어 놓으며 미리 계산된 행동을 하거나 예의 있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진실한 태도를 보이는 척하면서 거짓된 겸손으로 가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모든 관심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향하도록 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세례요한의 목소리와 눈빛에는 진실과 확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도 들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분이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구원이십니다. 그분이 능력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이 때 세례요한은 모든 것 되신 주님 안에서 참 자유 참 구원 참 평안을 얻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자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것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이 되어도 그는 만족했습니다. 나는 망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해야 할 것입니다. 명성의 유혹, 비교의 횡포, 자기기만이라는 헛된 생각, 정상을 향한 끝없는 질투, 자존심, 험담, 교만하게 머리만 커짐, 세례요한은 금세 사라져버릴 보잘것없는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을 차지하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여기 세례요한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신앙입니다. 주님이 모든 것 되신다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리를 비켜 드리고 참 자유 참 평안 참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계속해서 말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3:29). 세례요한은 행복했습니다. 자신이 맡은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한 것입니다. 자신은 신랑의 들러리였을 뿐입니다. 들러리가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름 없는 자요 그는 스스로 있는 자라이어서 세례요한은 영혼을 자유롭게 하며 육체를 꿰뚫는 말을 남깁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 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셔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높임과 존경과 경외와 영광과 관심과 기쁨과 광대함과 사랑을 받을 분은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이 높임을 받으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라는 확신에 찬 세례요한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한다는 목적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세례요한은 무엇이 진리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크시고 자신은 작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가 모든 것 되신 분께 모든 것을 넘겨드리고 참 행복을 누린 것입니다.

 

먼지 같은 나를 광대하신 하나님께 내어드림으로 누리는 기쁨과 구원과 행복을 얻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크십니다. 나는 작습니다. 작은 나를 하나님께 맡길 때 참 자유와 구원이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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