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오늘은 순교자 기념 주일이자 맥추감사주일을 한 주 앞 둔 주일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순교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 나아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삶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변증하는 설교를 한 후에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서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왜 스데반을 지켜주시지 않고 죽게 내버려 두셨는가’라고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죽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고, 하나님 옆에 계신 예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56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하나님은 스데반을 위하여 역사하셨습니다. 단지 스데반에게 순교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면, 주변에서 날아오는 돌들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아마 모두 순교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붙잡혀 가실 때,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53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만 바라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기 원하시지만,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세우셔서 여러 민족에게 보내십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순교도 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스데반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스데반의 사명은 거기까지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바울을 통해 더욱 큰 열매를 맺게 됩니다.
헬라 사람들은 시간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구분했고, 성경에도 구분해서 나옵니다. 크로노스는 객관적인 시간, 달력의 시간, 연대기적 시간,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반면,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포착되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입니다. 사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 종말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고, 미래가 우리에게 부딪히는 순간을 우리가 시간이라고 감지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조 때에 종말까지 다 구상하셨습니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고 본다면, 우리가 시간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미 완성되어 있는 미래가 우리에게 부딪히는 것으로 시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성경에서 종종 등장하는 “때가 차매”에서 말하는 때는 카이로스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신다는 것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 등장합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시90:4).”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사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중력에 의해 변하는 유동적인 것입니다.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릅니다. 이런 물리학적 이론을 토대로 시간을 초월한 5차원의 모습을 그려낸 영화가 2014년에 개봉한 “인터스텔라”입니다. 블랙홀에 빠진 주인공(쿠퍼)은 강한 중력으로 인해 시간을 초월하게 되고, 결국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게 됩니다. 동시에 보지만, 다른 시간의 영역에 있는 주인공은 딸(머피)과 소통할 수가 없습니다.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는 이것을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묘사합니다.
이처럼,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의 영역에 들어오십니다. 모세에게는 불타는 가시덤불로, 엘리야에게는 갈멜산의 불로, 다니엘에게는 환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영원의 영역에 계시는 분이 매개체를 통해 시간의 영역으로 침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시간을 빼고 본다면, 우리는 이미 천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매 순간 고민이 될 때, 또는 아픔이 있을 때, 현재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 과거의 모습을 돌아보는 장면이라고 생각해본다면, 현재의 고민은 더 이상 고민이 아닐 것입니다. 답은 언제나 분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죽음도 생각해보면, 시간을 초월해 조금 일찍 영원의 영역에 들어갔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완성해 놓으신 시간의 종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현실에 순응하거나, 체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완성해 놓으신 미래를 향해 능동적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의 세계에서 지금도 시간의 영역에 있는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는 우리가 절대 그 메시지를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길에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고,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했던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는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했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종교적인 박해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박해도 당하게 됩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야고보가 순교했습니다. 헤롯은 베드로마저 죽이려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베드로를 죽이기로 작정한 전날 밤에 온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옥 안에 갇힌 베드로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베드로에게서 믿음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죽을 수도 있는 전날, 이처럼 깊이 잘 수 있게 한 것입니까? 바로 모든 두려움과 염려를 예수께 완전히 맡겨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할 때 모든 일이 다 잘된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일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도 순교까지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크고 작은 어려움이 계속 닥쳐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내가 끝까지 하나님 말씀대로 가야 옳은가?’하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누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를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렵지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두렵지 않으면, 그 상황에서 함께 하실 주님을 기대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22장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2-3절).” 다윗의 이 고백만 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모든 어려움에서 피하게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다윗은 수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넘겼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고백은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고백이 아니라,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이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예수님도 부활하신 다음에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안하뇨?”였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인 평안입니다. 돈으로 인해 어려움이 있는 분들에게는 돈이 있으면 평안이 찾아오지만, 다시 돈이 부족해지면 불안해집니다. 돈뿐만 아니라, 건강, 명예, 직장 등 모든 것들이 영원한 평안을 주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세상과 다른 평안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 안에 거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슬픈 일이 많지만 항상 기뻐해야 해.” “기도가 잘 안 되지만,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해.” “세상에 불만이 가득하지만 항상 감사해야 해.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이 말씀은 나와는 상관없는 말로 들립니다. “어떻게 항상 기뻐하겠어?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만 하겠어?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기도를 쉬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저절로 기뻐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습니다. 기쁨이 없고, 기도가 되지 않으며, 감사가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 우리들을 창조하셨는데, 이 친밀한 관계가 깨지면, 기쁨도 사라지고, 기도도 사라지고, 감사도 사라지게 됩니다.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는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만나라는 은혜가 계속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또 만나야? 고기 좀 먹을 수 없나?” 은혜의 고백이 사라지니, 불평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빌립보서 4장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너무 많이 들어왔던 말씀이지만, 설교 준비를 위해 여러 번 다시 묵상해 보니, 그동안 제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이 본문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리라” 아멘이십니까? 하지만 바울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고,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입니다. 어려움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어려움 중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여러 번 다시 읽으며 목 메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렇구나.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구나.”
한때는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해결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기도함으로 상황이 해결될 경우, 우리의 영적 성숙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된다면, 이보다 큰 기도의 응답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마음과 생각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마음과 생각만 제대로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죄의 문제에서도 놓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밭에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곧 잡초로 무성해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내버려두면, 가룟 유다처럼 사탄이 주는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고, 그 생각은 싹이 나서, 결국에는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때가 되면 악의 노예가 되어 내가 원하지 않는 일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내적인 싸움을 합니다(롬7:22-24). 육신의 생각이 계속해서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간절한 몸부림이 바울을 바울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에서 완전히 돌이키지 못합니다.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런 육신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제 올 해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올 상반기에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었는지 이 시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맥추감사주일로 올 하반기를 시작하며, 여러분들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 보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님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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