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심령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서 우리의 영과 육이 회복되고 우리 속에 강건한 믿음이 세워지기를 기원합니다.
바이러스 재난의 시대를 살면서 골리앗을 생각하게 됩니다. 앞길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벽을 느낍니다. 일상을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아니 나의 입을 마스크가 막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진행할 수도 없고 함께 할 수도 없도록 가로막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 사용하실 물매돌이 필요합니다. 골리앗은 무리 가운데서 완전 돋보입니다. 신발을 신지 않고도 297cm가 넘는 거구에 56kg짜리 갑옷을 걸쳤습니다. 포대자루 만한 큰 옷을 입고 광주리만한 투구를 쓰고 길이가 150cm되는 벨트를 하고 있습니다. 괴물 같은 골리앗이 ‘오늘 내가 이렇게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했으니 한 사람을 내게 보내라 싸워보자.’ 골짜기에 쩌렁 쩌렁 고함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사십일 동안이나 질러대는 고함 소리에 기죽어 있는 초라한 사울 왕과 그 병사들의 모습이 상상됩니다. 심부름으로 전장에 오게 된 다윗이 나섭니다. ‘저가 누구이기에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능력이 강함을 믿었기에 다윗은 막대기, 다섯 개의 돌멩이, 물매를 들고 나섰습니다. 다윗이 외칩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목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결국 하나님의 힘으로 다윗은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물리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모하시는 사건이 있었던 동시간대에 변화산 아래에선 9명의 제자들이 간질 귀신 들린 소년을 치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일이 실패로 끝나자 서기관과 그 무리들이 댓돌같이 달려듭니다. 이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를 말씀 하셨습니다. 서기관 무리를 향해서는 ‘패역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고치지 못한 제자들을 향해서는 ‘믿음이 적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산을 옮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골리앗을 돌파할 수 있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로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의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아는 믿음입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누구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능력 있으신 하나님 아닙니까? 그러므로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물매(sling) 하나 들고 골리앗 앞에 섭니다. 오직 만군의 하나님 이름 하나 의지하여 출전합니다. 겉모습은 초라했으나 그 이면에는 신앙의 용기로 무장했습니다. 다윗의 신앙은 겨자씨 보다는 컸을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예호바 체바오트)이란 단어는 모세오경 여호수아 사사기에는 나오지 않고 역사서와 시가서에 18회 등장하고 예언서에는 240회나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체바트’는 ‘전쟁을 수행하다’ ‘섬기려고 회막에 나아가다’라는 동사 ‘차바’에서 유래된 말인데 우주 만물 중 ‘해 달 별’을 표시하거나 ‘군대’ 특히 ‘이스라엘 군대’를 말하거나 ‘천사 또는 하나님의 군대’를 일컬을 때 사용한 하나님 이름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고 그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하늘의 천군 천사를 통해 악한 자를 징계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대신하여 대적들과 전쟁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전쟁 승패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예호바 체바오트’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골리앗은 우상의 이름으로 나아왔고 다윗은 ‘예호바 체바오트’ 이름으로 나아감으로 우상과 참 하나님, 불신앙과 신앙의 대결이 이루어졌습니다. 골리앗의 무기는 자신의 용맹과 칼과 창이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의 무기는 그가 신뢰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다윗은 목숨을 건 싸움에서 어떤 무기를 의지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골리앗은 하나님을 부인하며 자기 능력과 세상 권세를 의지하는 교만한 자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비록 약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불의한 세력에 대항하는 신앙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의 최후는 비참하고 허무합니다. 시편37편에 ‘35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36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물리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의 무기는 고작 물맷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향해 충고하였습니다. '골리앗은 너무 크고 강하다(too big to hit)' 그러나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몸집이 너무 커서 돌팔매가 빗나갈 수가 없다(too big to miss)' 사람들은 골리앗의 큰 몸집에 겁을 먹었지만 다윗은 큰 체구가 오히려 좋은 타겟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습니다. 과연 다윗의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했습니다. 땅에 엎드러지니라 직역하면 그는 그의 얼굴을 땅에 떨어 뜨렸다’가 됩니다. 이것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항복이나 상대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표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골리앗이 하나님께 굴복하였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골리앗 앞에 서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장애물인 골리앗을 만날 때에 우리는 먼저 우리가 누구를 믿는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 만군의 하나님께 집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처럼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는 대상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습니까? 만군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무엇을 믿느냐 누구를 믿느냐 하는 믿음의 대상이 중요함을 알고 전능하신 주님을 믿음의 대상을 삼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의 믿음은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남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제자들은 귀신 들려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간질병(셀레니아제타이)은 뇌의 이상에서 비롯되는 병으로 당시에는 주로 달의 주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간질은 달(셀레네)에게 침범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달의 주기가 바뀔 때마다 발작하는 미친 병 넘어지는 병입니다. 5분에서 10분정도 발작 증세를 일으킵니다. 입에 거품을 물기도 합니다. 경련을 일으키고 자기 몸을 자해하기에 유대인들은 간질병을 귀신의 영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그 무리들에게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못하냐?’라는 힐난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한 것은 서기관과 거기에 동조하는 무리를 가리킨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믿음이 없는 자(아피스토스)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 전문가라고 하면서 선생이라고 하면서 어려서부터 고생하는 간질 소년을 돕지 못했습니다. 정결법을 굴레로 씌워서 가족의 아픔을 위로하기보다는 엄한 규칙으로 많은 멍에를 지웠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향해 믿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고 믿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올리고 피스티스)입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믿음은 생명력과 무한한 가능성의 힘을 지닌다는 사실을 강조하심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의 약함은 능력 부족이 아니라 믿음 부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그 어떤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일전에 전도 파송시에 귀신을 내어 쫓는 능력이 있었습니다(마10:1). 그런데 지금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이 나아가야 하는데 자신의 힘으로 착각한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큰 믿음 메가 피스토스가 되시기 바랍니다.
공룡을 믿습니까? 아스피린을 믿습니까? 이 두 질문은 아주 다른 질문입니다. 비늘 있고 용같은 공룡을 믿는지 알고자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 ‘아니오’로 답할 수 있습니다. 어떤 대답이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의 믿음은 순전히 지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아스피린을 믿느냐고 묻는 것은 두통 있을 때에 진통의 효과가 있는 이 약을 먹느냐 묻는 것입니다. 이 경우의 믿음은 그런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 어떤 것이 우리의 삶에 들어와 어떤 기능을 하도록 기꺼이 허용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즉 믿음은 능력으로 나타나고 우리의 삶에 힘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을 굳게 의지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 물리쳐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대적에게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온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약백성 택한 백성 구원받은 성도는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그 능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주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의 믿음은 생명력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믿음이란 단어가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을 말해 주는 것임에는 틀림없고 우리의 삶에 자유와 능력을 가져다주는 힘 있는 단어입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진리가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원인은 그들의 부족한 믿음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믿음은 겨자씨 같은 생명력을 가리킴을 말씀하십니다. 한 ‘겨자씨’나 ‘산’은 믿음의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소재인데 겨자씨와 산은 크기에 있어서는 비교할 수 가 없습니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믿음의 크고 작음 있고 없음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믿음의 생명력에 관한 말씀입니다. 겨자씨는 상당히 작습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작은 것을 비유할 때 항상 겨자씨만하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매우 작습니다.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작지만 겨자씨는 영양분 있는 환경에 있으면 점점 커져서 공중의 새가 날아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고 집을 짓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커집니다. 따라서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소망을 가지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생명력 있는 믿음입니다. 한편 여기 ‘산’이라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를 말합니다. 제 아무리 큰 문제라고 할지라도 생명력 있는 믿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능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작은 씨앗이 바위틈에 떨어져 발아하고 성장하여 결국 큰 나무가 되면 그 뿌리가 그 바위를 감쌀 뿐만 아니라 그 뿌리가 바위를 쪼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에는 생명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는 믿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도울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패역한 세대가 됩니다. 믿음이 적으면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없습니다. 패역이란 하나님을 배제하고 비난하고 배척하고 구부리고 변하게 하는 것이며 원래의 자리에서 이탈시키는 것입니다. 삐뚤어진 자세를 의미합니다.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가지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5:15) 믿음에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능력입니다. 작지만 생명력이 있는 겨자씨 믿음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주님을 믿는 생명력 있는 믿음입니다. 악하고 부조리하고 불가능한 세대에서 절망의 어두움의 세계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삶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거대한 재난의 장벽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해답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 대상 만군의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불가능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작지만 생명력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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