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생명의 축복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주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생명의 능력이 가득 채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영국의 시인이며 극자가인 존 마스필드의 ‘예수님의 심문’이란 희곡에서 십자가 처형의 책임을 맡은 롱기우스라는 백부장을 등장시킵니다. 그는 그 일 곧 예수 십자가 처형이란 과업을 마치고 돌아와 빌라도에게 보고했습니다. 십자가 사형을 집행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아내 푸로큘라가 ‘그 죄수가 최후에 어떻게 죽었는가’ 물었습니다. 그리고 또 푸로큘라는 갑자기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시오?’ 그 질문에 롱기우스 백부장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는 지금 어디 있소?’ ‘이 세상에서는 로마인이나 유대인이 그의 진리를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라고 백부장이 대답했습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유대 당국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함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빌라도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메시야임을 확증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이고 하나님의 아들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에 이르러 하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숭고한 자기 부정의 십자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부활생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심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시편 기도자는 극심한 곤경 가운데서 곧 자신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음을 알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굳게 신뢰했습니다. ‘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16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죽음이라는 결박에서 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불신앙과 의심의 결박에서 풀어주셨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부활신앙을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십자가 처형 후에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 걸었던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었습니다. 희망이 사라지니 절망이 찾아 왔습니다. 낙심한 마음으로 낙향하는 그들에게 근심에 싸인 여인들을 만나신 것처럼 부활하신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슬픔에 잠긴 제자들을 만나셔서 호되게 질책하셨습니다. ‘너희 미련한 자들이여’는 문자 그대로 말하면 ‘너희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의 말씀들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그 말씀들에 의하면 즉 그 말씀들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메시야는 자기 영광에 들어가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알 수 있었어야만 했고 또한 알고 있었어야만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 이제 그들을 성경으로 인도하십니다. 길에서 말씀을 들을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신다는 것을 체험한 제자들은 마음을 돌이켜서 다른 사람과의 친교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은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만나주신 부활생명 체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갔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단계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그 만남의 과정에는 무지와 더디 믿는 불신의 단계가 있었습니다.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주님을 몰라본 제자들을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그분이 주님이신 줄 알지 못하고, 주님에 관한 모든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전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가 주님과 함께 엠마오로 가는 동안에 일생의 가장 복된 시간을 누렸다고 해도,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주님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기 전에 주님 곁을 떠났다면 그들과 동행하던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도저히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무지와 불신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죽음에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알고 그 사실을 믿는 것은 물론이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복된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 시간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짐을 체험케 한 분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상태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인 줄 알아보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무지의 단계에서 삶에 나타나는 것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날 아침 두 제자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눈을 떴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살아 계신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을 믿으려고 애쓰지만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하신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복된 신앙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곁을 지키던 천사는 주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고 찾아온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24:5). 천사는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그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도대체 여인들이 찾아갔던 죽은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그리스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대신 모든 일을 행해야 하지만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행하신다는 점이 다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 아침에도 두 제자는 슬픈 마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믿었던 그리스도께서 저주받은 죽음인 십자가형을 당하셨으니 그 절망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들의 슬픔은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슬픈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는’(눅 24:25) 불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태도는 그리스도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두 제자의 이야기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로부터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이야기를 동행하던 나그네에게도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눅24:22-23) 그 말씀을 들은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목소리의 톤이 높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 중에 형제에게 ‘라가’라는 히브리인의 욕설을 하는 자들이 받을 형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주님은 그런 유형의 그리스도인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 예수님의 임재를 온전히 체험하기 원한다면 먼저 여러분 자신이 주님을 온전히 믿지 않은 ‘미련한 자’임을 기꺼이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 저의 불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님은 제 안에 거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나타내실 기회를 기다리며 제게 신실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님을 믿지 않은 것은 저의 잘못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함께 소유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믿는데 부활은 믿지 못합니다. 주님이 살아 계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단순히 믿고 받아들이는 신앙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대신 그런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런 태도는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믿음으로 붙잡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실을 의심하는 그들의 마음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그 불신 때문에 더디 믿는 삶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부활을 믿지 못해 주님의 몸에 난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만져 보기 전에는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 도마의 태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살아계심과 주님이 우리 위해 모든 일을 행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슬픔과 불신을 떨쳐 버리는 부활의 아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과연 살아계십니다.
둘째로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그 만남의 과정에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동의 단계가 있습니다.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다음 단계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동의 단계입니다. 감동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성은 ‘마음의 뜨거워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두 제자에게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성경을 풀어 선지자들이 예언한 놀라운 일들에 대해 가르치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성경 말씀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이 참된 말씀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부활하신 주님의 강한 권능에서 비롯된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사신 주님의 거룩한 권능에 의해 마음의 뜨거워짐을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예배를 통해서 혹은 성도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중에 마음이 뜨거워진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마음의 뜨거워짐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에서 비롯되는 소중한 체험입니다. 이 놀라운 체험이 부활의 아침 성도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뜨거워진다는 표현을 존 웨슬리 목사님도 하셨습니다. 1784년 5월24일 밤 올더스게이트 회심의 순간에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 읽는 것을 들었을 때에 그는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고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말씀 안에서 뜨거워지는 감동의 단계가 이루어지길 축원합니다.
이 감동의 단계에서 누릴 수 있는 체험에는 마음의 뜨거워짐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성경 말씀을 전과 다르게 보이도록 만들어 주심으로써 두 제자로 하여금 말씀을 새로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말씀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이 천국의 교훈인 것을 알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는 시간이 하루 중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가장 기뻐하는 일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 캐는 사람들이 다이아몬드 원석을 찾았을 때 기뻐하듯이 그들은 성경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살 때 큰 기쁨을 누립니다. 큰 감동을 누립니다. 감동의 단계에서 오직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그 만남의 과정에는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하는 연합의 단계가 있습니다.
‘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부활의 주님과 연합하는 단계의 삶은 ‘만족하는 마음’ 입니다. 주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 계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시는 '주님의 자기 계시’(the revelation of Christ)가 이루어집니다. 부활의 생명력을 날마다 살아냅니다. ‘마음의 뜨거움’과 날마다 우리를 돌보시고 복을 베푸시며 보호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 곧 그리스도의 임재로 연합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 거룩하신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을 부활하신 주님으로,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으로, 권능을 지니신 저희의 주님으로 알게 하소서.’ ‘나는 지금까지 신앙의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고백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부활하신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날마다 지금도 살아계시며 우리 대신 모든 일을 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며 사십시오. 그런 믿음으로 살 때, 어린아이가 날마다 어머니의 품안에서 살며 그 따뜻한 보살핌 아래 해마다 성장해 가듯이 매일 매 시간 거룩하신 예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가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에게 임재하시기를 구하며 그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실의에 찬 두 제자에게 나타나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계시하신 주님은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평강을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임재’ 입니다. 풍랑이 제자들을 삼키려고 위협할 때 그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 것도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평강과 안식을 누리고 싶습니까? 그러려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자기 계시를 체험했으므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 주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놀라운 임재를 체험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리스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가장 온전히 자신을 나타내실까요? 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를 준비를 갖춘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 제일주의’(God first)로 주님을 향할 때에 주님의 임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라는 말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God all, God everything)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우리가 할 말과 일을 가르쳐 주시도록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주님께 내어드리고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임재 하셔서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데는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불신앙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은 의심과 불신앙을 버리고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에게 오십니다. 살아 있고 온전한 믿음이 있는 곳에만 주님이 임하신다는 말입니다. 계속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특별한 임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체험할 때까지 끊임없이 구하는 것입니다. 얍복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처럼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까지 끊임없이 임재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 당신이 제게 축복해 주지 않으시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습니다.’ 그 끈질 긴 임재의 요청에 주님은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임재하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연약함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근본적인 원인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그들 안에 거하시는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내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연합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 사람과 제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과의 교제 안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매일 매 시간 그리고 매 순간 주님과 교제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계신 주님과 임재하신 주님과 교제하며 매순간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과연 살아계신 주님의 임재 속에 주님과의 연합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애통하는 마음이 삶의 중심 요소가 되는 ‘무지’와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에 더디 믿는 ‘불신’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동의 단계’에서 기쁨을 삶의 중심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 기쁨이 지속적이고 영원하기 위해 살아계신 주님의 임재 속에서 연합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기뻐하는 마음’으로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견딜 수가 없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주님이 과연 다시 사셨다’라고 외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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